때로는 잘못된 기록이 존재하기도 한다. 15세손 중에 응순(應順)이라는 분이 있다. 그의 족보 기록을 보면 충근정량 자헌대부 호성공신 봉시 익흥군(益興君)이라 기록되어 있다. 가계를 보면 아래와 같다.
球―伯卿―思成―억―原吉―孝剛―장―三俊―諶―┬―汝機 │ └―汝緝―應順―義健
15세 응순은 14세 여집(汝緝)의 아들로, 여집은 임진왜란 때 군기부정으로 전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집의 형은 여기(汝機)인데 이분은 1554년생으로 1588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좌랑을 역임하고 호종공신으로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에 증직된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런데 임진왜란 때의 호종공신 이응순이 우리 15세 응순과 동일 인물이라는 것에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봉호의 문제이다. 2세 금성군(錦城君) 휘 순우(純祐)의 경우에는, 우계(羽溪)와 상관이 없는 금성(錦城)을 봉호로 받았던 점에 대하여, 아직 집안이 아직 알려지기 전이었던 점과 특별히 하사받은 봉호라는 점을 감안해야 하겠다. 고려 말기에 오면 휘 순우의 4대손 6세 옥천부원군(玉泉府院君) 휘 녹후(祿厚)가 활약하였는데, 이분의 경우에는 옥천으로 봉군되셨다. 지금의 우계의 별칭 중에는 옥계(玉溪), 우곡(羽谷), 옥천(玉泉) 등의 별호가 있다. 이 중 옥계라는 명칭은 우계와 옥천 두 지역을 합쳐서 만든 명칭이 옥천이고, 옥천은 옛 우계현의 바로 위에 있던 고을 이름이다. 그리고 우곡은 우계의 별칭이다. 이 외에도 여러 별호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15세 응순의 봉호가 왜 하필 우계와 상관이 없는 지역 이름이 봉호가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조사 결과 익흥(益興)은 지금의 강원도 원주(原州) 지역의 지명이며, 원주이씨 중 이신우(李申佑)를 시조로 하는 원주이씨 중에 익흥을 본관으로 사용하는 이씨가 있다.
묘지가 없다. 뿐만이 아니라 묘지 기록도 없는 상태이다. 묘지의 경우, 우리나라는 특수한 상황으로 인하여 여태까지 900여 차례 넘게 침략을 당하여 오랫동안 전쟁을 겪어왔다는 점을 감안할 수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8세 원수공 억의 장남 판중공 만(蔓), 군수공 인숙(仁淑), 주부공 경창(景昌)의 3대 내외분이 양주군(지금의 남양주시 진건면 용정1리, 본래 남양주시도 양주군에 속했다가, 1980년 남양주군으로 분군되었으며, 1995년 미금시와 통합하여 남양주시가 되었다.) 선영하에서 발견된 바 있다. 그분의 선조이자 원수공의 차남인 원길(原吉)의 후손들이 양주에 거주하여 양주파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이변(만약 중간에 다른 지역으로 이주했을 제3의 경우)이 없는 이상, 양주 지역 혹은 원수공의 묘가 있는 영주 단산면 등이 그의 묘소를 찾을 수 있는 곳으로 보이고 있다.
생년의 문제이다. 14세 여기의 생년이 1554년이다. 따라서 그의 아우 여집은 생년을 최대한 빨리 잡아도 1555년이거나 1556년이다. 그러면 그가 아들을 보았을 때는 그가 대략 20세가 되었을 때의 일이므로 1575년이나 76년으로 잡을 수 있다. 만약 최대한 빨리 잡는다면 15세 응순의 출생년도를 1570년 경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조혼의 풍속이 있었어도 보통 20세가 다 되어서 자녀를 보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특기할 점은 임진왜란이 터졌을 때, 누군가 15세나 16세에 만약 임금을 호종하였다면 기록에 남을 일인데 이 또한 기록에 없다. 15세 여기와 그 아우 여집이 선조대의 인물이었으니, 여집의 아들 응순은 선조대 보다는 광해군 대에 활약했던 인물로 보는 것이 연대상으로 타당하다.
조선왕조실록 중 선조실록의 자료를 찾아봤는데, 임진왜란 동시대에 이응순(李應順)이라는 분이 있었고, 그가 임진왜란 때 임금을 모시고 의주로 몽양갈 때, 임금을 호종한 공로로 충근정량 호성공신에 녹훈되고, 자헌대부에 올랐으며, 익흥군에 봉해졌다는 사실을 발견해냈다. 그런데, 원주 지역에 그의 묘가 있다고 하여 찾아봤는데, 묘지명에는 본관이 원주로 되어 있었다. 봉호가 익흥군이라는 사실에 실마리가 잡히는 순간이었다. 그는 임진왜란 때, 동생 이응인(李應寅)과 함께 임금을 호종하던 중, 의주에 이르러 강물이 불자 임금을 업고 강을 건넜으며, 그의 형인 이응순이 뒤에서 그를 도왔다는 것이다. 그로 인하여 응인은 내금위장에 올랐고, 응순은 도총관에 올라 익흥군에 봉군되었으며, 후에 응인은 병조판서 원흥부원군(原興府院君)에, 형 응순은 좌의정 익흥부원군(益興府院君)에 추증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 15세 응순은 임진왜란 때의 호성공신 이응순과 동일인물이 아닌 동명이인일 뿐이며, 따라서 족보의 내용에도 충근정량 호종공신이라는 호칭은 수정됨이 마땅하다.
그런데 또 다른 자료에 이응순(李應順)이라는 인물이 있어서 다시 찾아보았다.
이응순(李應順) 선조 3년(1570)~효종 3(1653) 조선시대의 공신. 자는 자화(子和). 본관은 전주(全州)로 부정 윤(倫)의 아들이다. 광해군 때에 은거한 후 인조 5년(1627)에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임금을 강화(江華)로 호종했고, 그후 인조 14(1636) 병자호란 때 임금을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호종하여 1등 공신훈()에 올랐다. 파흥군(波興君)에 추증되었다. 묘는 시흥시 산현동에 있다. <출처> 시흥의 인물과 행적(1995, 시흥시 향토사료실, 이승언)
그런데 이는 시대상으로 본다면 우리 14세 여기가 선조조의 인물이니, 그 다음 세대인 15세 응순과 같은 시대이어서 혹시나 하여 찾았지만, 분명히 본관이 전주로 명시되어 있고, 따라서 우리 15세 응순과는 동일인이 아닌 동명이인이 분명하다.